경북 영주 부석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부석사는 무량수전과 떠 있는 바위로 유명한 곳이죠. 커다란 바위가 나를 맞이하며 여유로운 하루가 시작됐어요.
부석사 첫인상
아 이곳이 부석사구나. 옆은 주차장입니다.

부석사입구 근처엔 작은 폭포가 있었는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참 맑았다.
분수 아래 연못엔 작은 배모양 돌이 있고, 물안개가 살짝 피어오르는 모습이 몽환적이었다.
주변엔 소나무와 푸른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숲속 정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걸으니, 부석사에서 받은 평화로운 기운이 더 깊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곧 무량수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석축 위에 얹혀 있고, 그 앞엔 오래된 석등이 조용히 서 있었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치며 나를 맞아줬다.
절집 특유의 고요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무량수전과 건축
무량수전 앞, 나무와 바람의 속삭임
무량수전 앞에 서니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건물의 곡선이 참 예뻤는데, 지붕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무 기둥과 창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따스한 빛을 만들어냈다.
마루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니, 소백산의 푸른 능선이 물결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마치 나를 위해 연주하는 작은 음악 같았다.
여기 앉아 있으니 세상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무량수전 앞 마당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고, 어떤 이는 석등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어르신들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그 소리가 고요한 절집에 생기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마당 한쪽엔 커다란 바위가 보였는데, 주변에 앉아서 잠시 쉬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산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아봤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햇살이 살짝 따끔하게 얼굴을 비추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투박하지만 멋이 보이는 창살





부석사하면 이런말은 한번쯤 들어봤을것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한국사를 연구하고 작가도 겸하신 최순우 선생의 전집에서 주옥 같은 글을 추려내 엮은 단행본에서 나온글이다. 나도 한번 기대 보았습니다.



안양루와 기타 건축
안양루도 참 멋진 건물이에요.









부석사 역사와 유물
창건과 역사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로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이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석사는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로 불리우게 됨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어있지 않고 떠 있어서 '뜬 돌'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고래시대에는 선달사 혹은 홍교사라고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부석사는 무량수전 등이 크게 중창되었으나 공민왕 7년(1358년) 외적의 병화를 당하였고, 그후로 우왕 2년(1376년)에 무량수전이 재건되었고, 우왕 3년(1377년)에는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제1636호), 삼층석탑(보물 249호), 당간지주(보물 255호), 대석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고려목판(보물 제735호), 원용국사비 등이 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당간지주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기둥의 높이는 428cm 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키가 제법 큰 돌기둥인데,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돌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어보니, 거친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기둥 사이에 연꽃이 새겨진 받침돌이 있었는데, 그 단순한 조각이 참 정감 있더라.
주변엔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이 돌기둥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선묘 설화와 부석바위
부석사 창건설화 - 선묘설화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떠났을때, 노철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지금의 산동성 북부 덩조우)에 도달했는데, 한신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논데.
그녀는 의상대사에게 반하여 가까이 하려고 했지만 대사는 속세를 떠난 몸이기에 청을 들어줄수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선묘는 스님의 굳은 의지를 보고 도심을 일으켜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하겠습니다. 대승을 배워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겠습니다. 저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바치겠습니다.
그후 의상대사는 장안 종남산에서 지엄 스님으로 부터 10년간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길에 올랐다.
의상대사를 선창에서 보았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그 동안 준비해 두었떤 법복과 생활집기를 들고 뒤쫒아 갔으나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선묘는 내몸이 변해서 대룡이 되기를 비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에 선묘는 용이 되어 황해의 천리 길을 의상 스님을 호위하여 무사히 신라 땅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왔따.
이후 왕명으로 의상대사가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 할때 였다. 그곳에 있던 잡귀들이 스님의 불사를 방해했다.
이때 선묘의 용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리기를 세 차례나 하였더니, 무리들이 기겁을 하며 굴복하고 그 자리를 뜨니, 대사가 바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
의상 대사는 부석사에 화엄도량을 크게 일으켰고 선묘는 석룡이 되어 절을 지켰다.
석룡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밑에 머리를 묻고, 무량수전 앞 마단의 석등 쪽으로 꼬리부분이 묻혔다고 한다.
현재 부석사 뒤 쪽에는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과 부석바위가 남아 있다.

떠 있는 바위, 신기한 자연의 선물
무량수전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땅에서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석’이라는 이름이 이곳에서 왔나 부다.
바위 아래를 손으로 더듬어보니 정말로 공간이 느껴지는 듯 해서 신기했다.
자연이 만든 이런 신비로운 모습 앞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바위 옆에서 산을 바라보니,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고, 멀리 산자락이 겹겹이 쌓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자연이 주는 평화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성보 박물관
부석사에는 성보 박물관이 있어요.









개인 경험과 팁
사과 향기와 함께
부석사를 오르는 길에 작은 장터가 있었다. 할머니들이 직접 키운 사과를 팔고 계셨는데, 빨간 사과들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맛있어요, 한 번 드셔보세요!” 하시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사과 하나를 사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달콤하고 아삭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사과를 먹으며 다시 한 번 부석사를 돌아봤다. 산과 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영주도 사과가 유명하다. 지금은 저가격이 아니겠지만.

조사당 선비화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입니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합니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에 남는 기억
부석사는 화려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나무와 돌, 바람과 햇살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나는 잠시나마 세상 걱정을 잊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람 냄새 나는 마당, 소박한 돌기둥, 그리고 산자락의 풍경까지… 모든 게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 그때는 무량수전 마루에 앉아서 더 오래 산을 바라보고 싶다.
부석사는 그런 곳이다. 조용히 마음을 채워주는, 따스한 기억으로 남는 곳.
아름다운 영주로 힐링여행을 떠나거든 부석사를 들러보는것을 추천합니다.
천왕문을 지나야한다. 사천왕들이 안에서 절의 입구를 지켜 귀신들이 못들어오게 한다.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 비롯 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베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부석사 홈페이지글)



영주 음식 후기
산을 내려오니 배가 고파서 절 주차장 앞에 있는 식당에 갔는데 산채비빔밥 먹고싶어서 들어갔는데 식당마다 전부 웨이팅이 2-3시간이라 결국 못기다리고, 그마저도 알수가 없다네요. ㅠ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짬뽕집이 보여서 들어갔었어요.
뜬금없지만 너무 맛있게 먹어서 다시가면 그맛이 나려나 모르겠지만 그당시에 인근에 먹을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짬뽕 전문점답게 종류가 10개도 넘었어요.


황제열짬뽕이었나. 그런데 안맵다는~~ 하루종일 걸어서 배가 너무 고파서 너무 맛있게 먹었네요.
탕수육도 바삭하고, 좋았어요. 열짬뽕인데 안맵다는걸 꼭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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